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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통일칼럼]한반도를 위해 소망을 갖고 기도합시다.(극동방송)

2010년 1월 15일, 극동방송의 '통일칼럼'을 위해 녹음한 내용입니다. 방송일자는 저도 잘 모릅니다.→1.17(주일)05:30~6시 사이에 방송됐답니다. www.febc.net 에서 다시듣기가 돼네요. 저도 본방은 못 듣겠네요.

한반도를 위해 소망을 갖고 기도합시다.

오늘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한반도 문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패배주의를 벗고 소망을 가질 것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2009년에는 남북 문제를 위해 애써오던 두 전직 대통령을 잃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에는 지난 두 정권 10년간의 대북교류 노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냉혹한 평가도 한 몫 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냉혹한 평가의 원인에는 두 정권의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북한측이 남측의 호의에 상응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기에 우리 국민들이 ‘피로감’에 시달린 까닭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고, 빌립보서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사람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소망’이 있을 때 가슴이 뛰지만 소망이 없을 때는 의기소침하며 무력감에 빠집니다. 2000년도에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을 때 국민들은 그 사건만 본 것이 아니라 통일의 가능성이라는 ‘소망’을 발견했기에 흥분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불과 10년이 지난 지금, 남북관계는 다시 무기력해졌습니다.(빌립보서의 '소원'은 '의지'에 가깝습니다. '소망'의 결과나 원인이라는 뜻으로 씁니다).

오늘날의 한국에는 통일 문제가 아니더라도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절망과 패배주의가 만연할까 염려됩니다. 청문회에 나서는 공직후보자들마다 ‘위장전입’‘투기의혹’을 기본으로 달고나오니까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너무 바보스러웠던게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부도덕한 사람들이 지도층인 상태로는 통일을 이루기도 어렵겠지만, 설사 그런 통일이 이뤄진다 해도 행복할 수 있을지 염려됩니다.

또 하나의 패배주의는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강대국의 눈치나 살피면서 이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부족과 왜곡에서 비롯된 지나친 자기비하 입니다. 우리에겐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인력과 자원이 충분히 있습니다.

‘소망’을 갉아먹는 패배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고 하는 신자들까지 말씀 앞에 떳떳치 못하게 하고, 확신 없는 삶을 살게하고, 비전이니 사명이니 하는 것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런 분위기에서 ‘통일된 한반도’와 같은 ‘더 나은 사회, 공동체’에 대한 도전은 흔히 ‘허황된 이상주의’로 몰아붙여집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대륙에 각기 잘 살고 있는 27개의 나라가 있다. 인종과 역사가 다르며,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치열하게 전쟁도 겪었습니다. 이 국가들이 평화를 위해 각자 고유한 주권(sovereignty)의 일부를 양보하면서까지 ‘통합’을 시도하려 합니다. 어떻습니까. 너무나 허황된 꿈이 아닌가요. 이것은 바로 유럽공동체(EU)다. ‘허황된 꿈’이자 ‘이상주의’같아 보이는 유럽공동체는 이미 화폐 통합을 넘어 하나의 헌법에 합의했습니다.

그렇다면 남한과 북한의 통합은 어떻습니까. 앞의 유럽공동체와 비교해 볼 때 남북의 통합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실현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믿음은 주님이 오시기 전 지상에서 유토피아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유토피아의 수준이 아닌 실현 가능한 ‘더 나은 공동체’ 즉 ‘통일된 한반도’의 소망에 대해서‘허황된 이상주의’라고 비난하고, 실천하는 길을 막고, 패배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소망을 버리고,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절망하거나 이기주의적 삶을 살아가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절망의 현실에 무릎 꿇는 것을 거절하고, 촉각을 세워 소망의 이유를 찾는 동시대의 성도들을 남겨두셨을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청취자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성도들 되셔서 남북한을 위해 기도하실 때 소망 가운데 차선이 아닌 최선의 결과만을 간구하시고,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그 소망을 전파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