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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통일을 위한 통섭(統攝)지성의 동원

[연세대 대학원신문]2010년 3월 6일기고


통일을 위한 통섭(統攝)지성의 동원


학문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발생하고, 각 영역의 전문성이 깊어지면서 점차 세분화 되고 있다. 뻔한 논리적 귀결은 세분화 된 각각의 영역만으로는 해당 영역을 넘어서는 복합적 문제를 인식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며, 당면한 현실은 거의 모든 문제가 복합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현실 문제에 도전하는 학문은 다학제적(multi and interdisciplinary) 접근이 요구된다. 그리고 대학을 중심으로 한 제도들은 자연스럽게 이 일이 이뤄지도록 하고 있다.

‘통섭(統攝, Consilience)’은 ‘학제(學際)’와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분명 한 차원 다른 개념이다. 통섭은 지식 분야간의 협력이나 영향을 넘어 ‘지성’의 통합, ‘자의식’의 융합을 논한다. 통섭 접근이 과학적 과정을 담보할 수 있다면 보다 더 본질에 가까운 인식, 더 풍성한 인식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해결을 위해 통섭을 요하는 문제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겠지만, 이 지면에 소개되고 있는 몇몇 분야들이 ‘협동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대학원에 설립됐다는 것은 그 분야의 우선순위와 얼마나 절실하게 통섭 접근을 요구하는가를 나타낸다고 해석된다.


한반도 문제와 통섭적 접근

한반도 문제를 접근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학제협력이 있다면 철학, 정치․경제학,  사회학, 국제정치, 그리고 역사학의 제 분야가 될 것이다. 이들 학문이 각각 한반도 문제를 규명하는 바탕 위에서 통섭 지성이 쏟아부어질 때 비로소 문제의 본질에 풍성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현재의 학문적 자유가 얼마나 잘 보장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 과정의 김형기 교수(전 통일부 차관)는 ‘통일학’의 성립을 1987년 이후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에 관한 정보를 정부가 독점하고 제한했기 때문에 ‘통일학’ 혹은 ‘북한학’이라 부를만 한 학문적 활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북한에 대한 원천정보는 우리 학교의 네트워크에서도 일부 검색이 가능할 정도로 개방되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히 해소됐다고 하기는 어렵다.

통일학의 최우선 지식인 분단의 역사 인식을 위해서는 식민지 시기의 ‘세계화’로부터 최근의 세계화의 변동에 이르는 역사적 흐름을 이해해야 하고, 거기엔 철학과 종교, 동아시아 내 각 사회 대중의 의식, 일상생활에 관한 지식이 망라돼야 한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국내정치적 이용을 위한 역사와 사실의 왜곡이 도처에 남아있기 때문에 과거 연구결과의 유효성을 검증하는 학문적 노력도 요구된다.

한반도의 분단이 일국(민족)내 사건만이 아니라는 것은 일반화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가장 압축적인 ‘세계’인 동아시아는 지리적 특성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독특성을 지녔다. 일본은 이미 120년 전에 스스로 아시아국가가 아니라고 했다가 하토야마 정권의 등장과 함께 다시 동아시아로 들어오는 형국이고, 미국은 이미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국가’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다 오바마는 스스로 최초의 태평양 출신 미국대통령임을 자처한다. 중국은 북한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미중관계는 한반도 긴장의 가장 큰 변수로 남아있다. 미국의 이라크 개입과 침공은 미국내 정치구도를 반전시켰을 뿐 아니라 북한의 공포를 자극하여 부시 대통령 임기동안 플루토늄 보유량을 3배 이상 늘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들은 과거사 인식과 미래의 전략 수립 모두에서 국제관계의 지식과 지성적 통찰력을 빼놓을 수 없음을 말해준다.

통일 문제의 주요 당사자인 한국 사회가 ‘분단사회’로 존재하면서 어떤 변화를 겪어왔으며 현재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는 것은 학문으로서의 통일학이 서 있는 토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다. 분단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정치체제, 평화의식, 대외관계, 경제생활 등 삶과 학문의 거의 모든 영역을 제한해 왔고, 한국 사회의 발전은 이러한 제한을 풀어낼 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에 부합하는 강점으로 돌변시키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북한체제의 규정을 위해서도 다학제 연구와 통섭 지성이 동원된다. 북한 내부의 시각으로 북한을 해석하는 입장으로, 송두율 교수가 제시해 논쟁이 됐던 ‘내재적 접근’으로부터 그 상대편에 섰던 흐름들, 일련의 논쟁을 거쳐 ‘다원적 접근’으로 수렴되는 과정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90년대 이후 증가한 탈북자들은 한국에 정착하면서 수많은 증언들을 쏟아내 북한을 보다 실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난민’이며 피해자인 그들은 북한인도, 제3국인도, 한국인도 갖지 못한 경험과 심리적, 정신의학적 특성을 갖기 쉽다는 점을 간과하면 오히려 왜곡을 불러올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의 보완을 위해서는 입국 경로와 과정에서 이들이 겪은 일에 대한 이해와 함께 정신의학과 상담심리학 지식이 요구된다.

한반도 평화는 미래적 사건이고 움직이는 세계 속에서 그것을 이뤄야한다면 세계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예측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나가는 지성이 요구된다. 후쿠야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세계화의 정점으로 보고 ‘역사의 종말’을 논했지만, 불과 십여년만에 신자유주의는 뒤집혀 있다. 흡수통일이냐 아니냐 하는 논리는 토론을 위한 입장정리에는 유용할 수 있으나 남과 북 그리고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관찰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남과 북이 더 나은 지점을 향해 병진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산술적 합보다 더 나은 통합을 꾀하는 것이며 그 속도와 주도권, 각 분야별 수렴지점의 위치 등이 핵심적 관심사다.


현실을 위한 통섭지성

한편 남북의 이해관계와 입장의 조절, 문제 해결 방안의 도출, 대중여론의 선도, 현실 문제의 해결, 구체적 정책의 도출 등을 위해서도 통섭 접근이 요구된다.

과거 남북관계에서 실질적으로 서로의 입장을 가지고 주고받는 협상을 해 본 시기는 매우 짧았다. 주고받을 것이 없는 대화는 사실상 입장표명에 그치거나 대립을 표면화하는 기제가 되기 쉽다.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 정권이 붕괴하는 상황이 예측된다고 하더라도 협상을 지속하는 것이 유효하다. 협상이 중단되면 북한은 핵 능력 증진, 무력시위, 북중관계 심화 등으로 이후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데 몰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상의 결과만을 놓고 대화 여부를 저울질하는 것은 대화 자체가 갖는 효과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만일 남북이 협상에 의한 이상적 과정을 밟아 통합으로 나아간다면 거기에는 ‘더 나은 근대국가(혹은 연합체)’라는 목표가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이 열악해도 남측의 그것을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것은 2만 명을 헤아리는 탈북자의 남한정착 과정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오랜 분단으로 상당히 이질적 문화를 가진 남과 북의 통합은 이미 다문화사회의 통합 관점에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또한 한국 사회가 가진 행복하지 못한 제도와 사회상 - 공교육과 사교육, 금융위기에 취약한 구조, 최악의 자살율 등 - 이 북측에 전이되지 않고 통합과 함께 개선되는 방향으로 디자인돼야 한다.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한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통일교육’ 분야의 노력이 필수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반도 문제는 실체에 대한 지식을 풍성히 하는 것과 더불어 왜곡된 지식을 교정하는 지난한 작업도 함께 필요하다. 각종 매체의 활용, 교육학, 교육공학적 지식과 기법이 동원된다.


이질적 실체의 통합학, 국가관리의 필수학문으로 발전

누군가 통일 이후에도 통일학이 필요한가를 묻는다면 그 실체는 ‘통합학’이었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랬동안 이질화 된 남북의 두 사회를 하나로 묶어내는 작업이 짧은 시간내에 완성되기 어렵다. 구서독과 같이 비교적 잘 준비되고 자원이 풍부했던 경우도 통일 이후 20년 이상 통합이 진행중이다. 통일학의 현재가 남북간 이질적 정치체제의 통합을 두고 씨름하고 있다면 미래는 새롭게 건설된 한반도 국가 내부의 온전한 통합과 이를 관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동아시아 전략의 수립에 관여하게 된다면 매우 소망스러운 상황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 거대한 갈등을 해결하고 관리한 경험이 세계의 여타 분쟁 상황을 해소하고 통합하는데 학문적․실제적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통일학(미래의 통합학?)의 가치는 그 이름의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이다.


정치적 현실과 학문적 현실

남북한의 통일에 대해서 동시대 한국인들의 요청은 그리 열정적이지도, 냉랭하지도 않다. 2000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보면서 환호했고 지지했으나, 이명박 정부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를 보면서 이를 개선하라는 강력한 여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생존의 절대조건이다. 이 문제를 ‘다수결’에 맡겨둘 수 없는 이유다. 누군가는 사회적 지지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이 분야를 진전시켜야 하고 일정한 결핍도 감내해야만 한다.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학문적 현실이 우리 과정 내에서 모두 충족되고 있는것은 아니다. 통일학협동과정의 원우들이 교내외의 우수한 강좌를 찾아다니고, 타교의 유사전공자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실제 대북활동에 종사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통섭 지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