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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하나님은 평양도 아끼신다


하나님은 평양(과 북한)도 아끼신다. 그곳 역시 하나님이 수고하고 재배하셨고, 거기에 어린이와 생명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대북 정책적이 '압박'이든 '교류'든 간에 인도적 지원은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인도적 지원'이 못마땅하다면 다른 어떤 방법이라도 강구해서 그 생명들에게 가해질 압박과 죽음의 위협을 덜어내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구약성경 요나서4장 11절 일부)

요나는 악독한 성읍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던 요나는 혹시나 자신의 외침을 듣고 그들이 회개하여 망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꼼수를 부린다.

그 꼼수는 니느웨 가는 배를 타지 않고 '다시스'행 배를 타고 배 바닥에 누워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태풍과 풍랑을 만나게 하시고, 각자 자기 신들에게 울부짖는 승객들 가운데 요나가 지목되게 했다.

요나 역시 자기 때문에 풍랑이 온 줄 알았다. 제비뽑기 끝에 그 사실이 밝혀지자 이교도인 선원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요나서1장 10절)"

세상의 이교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네가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다.

이 일이 밝혀지자 요나는 '자기희생'의 정신을 보인다. 자기 스스로 선원들에게 "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요나서1장12절)"고 하는 것이다.

(갑자기 이 대목에서 '심청이'가 생각난다. 심청이가 던져진 인당수는 백령도 북쪽 13키로미터쯤에 위치한 북한땅 장산곶 앞바다. 백령도에는 '심청각'이 있다. 이번에 침몰한 '천안함'은 백령도 남쪽 바다다).

하나님은 '커다란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3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다(거의 전국민이 아는 스토리. 어려서 주일학교 안 가본 사람 몇 안되고, 주일학교에선 요나 얘기가 단골이니까)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갖은 회개를 다 하지만 물고기가 육지에 자신을 토해내자 마음 바뀐다.

다시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요나는 '시늉'만 하기로 한다.

걸어서 종단하는 데 3일이 걸리는 성읍을 '하루동안'만 걸으며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했던 것이다.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그 하루의 경고에 대해 니느웨 왕과 거주민들이 '오버'라고 느껴질만큼 회개를 한 것이다.

왕이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것은 물론, 백성과 함께 가축들까지 금식하도록 했다. 한 가지 우스운 것은 짐승들에게도 굵은 베옷을 입혔다는 점이다. - 나는 어떤 성화에서도 소떼나 양떼가 단체로 베옷을 입은 장면을 본 적이 없다. 혹시 번역상의 오류일까?

이처럼 '오버'라고 느낄만큼 철저한 회개가 있은 후 하나님은 재앙을 내릴 뜻을 철회하신다.

요나의 본성이 이 때 드러난다. 그 '재앙의 철회'를 심히 못마땅해 하는 것. 자기를 죽여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하시면서 요나와 논쟁을 시작한다.

요나는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앉아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지 보고 있다(아마도 예정대로 무너지는 장면을 기대했을 듯).

자애로우신 하나님은 박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셨다. 요나는 '크게 기뻐했다' - 진짜 죽을 마음이 없었던 듯 하다.

기쁨도 잠시, 다음날 새벽에 벌레가 박 넝쿨을 갉아먹고, 뜨거운 동풍과 해가 쪼이자 다시 요나는 '내가 죽는게 낫지' 한다.

하나님은 다시 "네가 박 넝쿨로 인하여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두 번째 비슷한 질문을 하시고 요나는 "옳습니다"고 부득부득 우긴다.

하나님은 "네가 수고하지도, 재배하지도 않다가 하룻동안 있었던 박넝쿨을 아꼈다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어린이)'가 십이만 명이고 가축도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어떻게 아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요나서는 거기서 끝나고 있다. 요나의 대꾸가 없었을 듯 하다.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명(잔여수명)과 3세 승계구도,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 등을 두고 '북한 붕괴론'이 다시 의식과 정책, 그리고 한반도 주변정세에 깔려들어오고 있다.

과거의 '붕괴론'은 엄청난 패착이었다. 1993년 북미 제네바 합의의 배경이 됐고 그 결과물인 경수로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나서 부도난 공사현장으로 남았다. 아들 부시때의 대북 강경책은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 3배 증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결국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고 분단 년수의 세계기록만 경신하는 중이다.

지금 대두되는 붕괴론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 지는 따로 길게 관찰하고 논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수고하고 재배하신' 성읍과 어린이와 가축, 즉 모든 생명체를 '아끼신다'는 점이다.

'붕괴'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정책 담당자라 할지라도 평양(과 북한)을 하나님이 수고하고 재배하셨고, 거기에 어린이와 생명체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을 하나님이 아끼실 것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먼저 담아야 한다.

그 결과는 정책적 입장이 '압박'이든 '교류'든 간에 인도적 지원은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인도적 지원'이 못마땅하다면 다른 어떤 방법이라도 강구해서 그 생명들에게 가해질 압박과 죽음의 위협을 덜어내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정부가 이 부분에 있어 현저한 불순종 가운데 있음을 관찰한다.

이 정부 들어 북한에 대해 인도적 지원을 거의 끊었을 뿐 아니라 - 몇몇 생색내기용 지원은 지원이 아니다 - 민간이 지원하려는 것까지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태도로는 매우 부적절하고 묵상없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다.

하루빨리 이 정부가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적 태도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