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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한반도의 오늘, 어떻게 읽어야 하나

‘신학으로 세상읽기’ 2011년 2월 25일기고, 4월 30일자에 게재


한반도의 오늘, 어떻게 읽어야 하나


윤환철(한반도평화연구원 사무국장)


1. 한반도 문제의 좌표

독한 전쟁을 겪고 나서 생존본능을 크게 자극받고 불타는 적개심으로 나라를 지키고 세운 선배 세대를 볼 때 가슴이 아린다. 이 분들에게 우리 세대가 “당신들은 왜 평화를 만들지 못하고 지금까지 전쟁의 불씨를 남겨두었나요?”라고 따진다면 가슴이 무너질 것이다. 그 시기의 시대정신은 거기 미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은 그런 역사의 물줄기를 돌릴 힘이 없었다.

남한의 통계에 따르면 반도의 북쪽에 세워진 공산주의 국가는 1968년경까지 남쪽에 세워진 자본주의 국가를 경제에서 앞서 있었다(북측은 더 나중이라고 주장한다). 이 상황이 뒤집히고 나서는 북한이 남한을 따라잡지 못할 뿐 아니라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우리에겐 ‘힘’이 있는 셈이다.

남북한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내부 정치적 필요가 생기면 서로에게 대화와 교류를 제안하고, 불리하면 닫고 적대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그리고 각각의 주민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차단한 채 일단 미워해 줄 것을 요구했다. 첩보원과 무장공작원들은 남북이 주고받았지만 남쪽이 보낸 공작원의 존재는 알기 어려웠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이제는 한 국회의원이 북한에 침투해 누군가를 살해했던 과거를 자랑한다.

한국의 학자들이 남북문제에 관해 학문다운 연구를 시작한 것이 1988년 이후였기에 그 결과물들이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는 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1987년 6월 항쟁에 의해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비로소 남한에서는 북한과 분단 문제에 대한 연구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전의 지식들은 기초자료에 접근이 극도로 제한된 상태였고, 제한이 풀린 이후에도 상당기간동안 과거에 왜곡된 지식과 정보들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도 노년층에서 과거 지식의 오류에 매여 있는 현상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남북한이 여전한 적대관계 속에서 조금이나마 ‘진정성’, 다른 말로 실현 가능성을 열고 접촉한 것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한 시기였다. 물론 그 전에도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최고 권력과 정책 입안자들과 관료들 그리고 시민들의 마음이 같지 않았고 대개 내부 정치적 활용에 그치곤 했다. 이후 참여정부까지 약 10년간은 분단 이후 50년 치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교류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이뤄진 일은 거의가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만큼 그 평가도 엇갈렸다. 우리는 정치권의 여야, 지방자치, 독립적인 시민사회, 종교 등으로 구분돼 있고 북측은 현저하게 획일성이 강하다. 이런 비대칭 관계에서도 각 부문별 교류는 깊이와 넓이를 더해갔다. 지금은 북한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도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에는 남북교류에 나서려고 했었다. 산하 연구기관인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는 ‘서울-평양간 도시교류 계획’을 수립하고 상당한 예산을 확보하기도 했다. 서울시의 계획은 매우 치밀했으나 결정적 문제가 ‘평양시장(인민위원장)’이 이명박 시장이 파트너가 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었다. 북한의 구조상 평양시 인민위원장은 남한의 서울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존재라는 점을 놓치고 있었다. 이 계획의 입안자는 북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고집이 센 연구자였을 것이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후보의 인수위는 ‘비핵·개방·3000’이라는 대북정책기조를 탄생시킨다. 지지자들 중에서도 보수적인 분들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앞의 ‘비핵’과 ‘개방’은 조건이고 ‘3000’은 그에 따른 보상(결과)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복잡하다. ‘비핵’을 어떻게, 그리고 누가 정의하는가? ‘개방’은 어느 정도까지 열어야 개방인가? ‘3천’이라는 목표는 누가 성취하며 우리가 북측의 ‘국민소득’을 보장해 줄 수 있는가? 북측의 수용가능성은 차치하고, 단순설명도 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통령직인수위가 내세운 첫 조치는 북측과의 대화 파트너인 통일부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보수적인 이들까지 ‘통일’이라는 헌법적 의무를 방기하는 것으로 보고 흥분해서 이를 비판했고 대통령은 마지못해 살린 통일부 장관에 외교부 출신을 임명했다. 이는 ‘통일부 업무를 상당부분 외교부가 흡수한다’는 통일부 폐지의 취지를 반영한 것으로 읽힌다. 없애지 못했으나 그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외교부는 다른 나라를, 통일부는 다른 나라로 보지 않는 북한을 상대하는 제도다.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상호 인정하는 바탕에 통일부가 있는 것이다. 이명박정부는 1992년 이후 남북 간에 공유된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외국으로 취급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전에 맺은 당국 간 관계들은 무효에 가까워진다. 이 대통령의 강경한 기조에 북한도 계속 빌미를 제공했다. 금강산에서 박왕자 씨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이전 정권의 관성으로 이어지던 교류마저 급히 축소되고 말았다.

2.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피격

한반도 문제가 쉽지 않은 것은 남북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 열강과 모든 경우의 수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교전 상대국은 연합군(미군)이었고 미국 정권의 향배는 한반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휴전 당사자가 아니었지만 최대 이해당사자인 대한민국은 남북 관계와 의제를 선도해 나갈 때만 당사자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UN주도의 제재(制裁)는 중국이 거부하거나 역할을 일부러 게을리 하면 거의 효과가 없다. 일본은 배상의무를 피하기 위해 소수의 일본인 납치자를 거론하지만 미국에 종속적이다. 러시아는 현실적 힘이 없지만 안보리 이사국으로 무시 못 할 표를 행사한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군과 정부의 발표에 대해 통일부 출입기자의 절반이 믿지 않는다고 통일부 고위 관계자가 한탄했다. 믿지 않는 기자들을 한탄할 일이 아니라 ‘과학’의 이름으로 입증하지 못하면서 어설픈 증거물과 거짓 보고로 신뢰를 잃은 것을 탓해야 한다. 서해의 유일한 용의자인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를 받으며 국제 사회의 유죄판결을 피해갔다.

우리는 북한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탄식하지만, 북한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모든 조직체가 그렇듯 그들도 내․외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생존하고 있다. 최근의 가장 큰 변화는 김정일의 건강위기에 따른 급속한 후계 체제다. 스위스에서 교육받은, 나라에 대한 기여가 전무한 27살 청년 김정은(최초 ‘정운’)이 초유의 삼세 세습의 당사자였다. 지도자에게 일정한 정당성과 권위가 필요하다는 보편적 원칙은 북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 정통성 확보를 위해 김일성 사적지를 돌고, 중국의 인정을 받으려 했으며, 권력의 근원인 ‘총구’를 장악하기 위해 ‘포병전략가’라는 군사적 경력을 만들었다.

북측은 중국과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성과를 거둠으로 김정은이 통치에 개입한 시기의 첫 업적을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는 절대 내주지 않던 천혜의 항구와 각종 개발권을 내줬고 남측에는 별안간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했다. 멈춰있던 금강산관광 재개에 시동을 걸고 싶었던 것이다. 남측의 반응은 싸늘한 거절이었고 중국으로부터도 당장에 들어오는 성과는 없었다. 아마도 그들의 두 번째 선택은 연평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신예 포병전략가의 승리’라는 시나리오, 과거 패배한 서해 인민군 부대들의 보복의지가 겹친 상황에서 마침 남측에서 포격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을 중지하라는 그들의 전통문은 남측에서 무시됐고 결국 휴전 이후 처음으로 남측의 영토, 그것도 민가를 포함한 지역에 대한 포격이라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날은 연평도 교회 담임목사의 위임식 날이었다. 인천에서 온 노회 손님들은 선착장에서 바로 발길을 돌렸다. 평안한 일상은 깨져버렸다. 적군의 포격과 화염, 피난의 아수라장, 고귀한 목숨의 희생, 아군의 반격……. 연평도 사태는 모든 요소를 갖춘 전쟁으로 기록됐다.

3. 미․중 정상회담의 한반도 의제

1월에 있었던 미중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가 융숭한 대접을 받는 장면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전 세계가 중국에 인권 압박을 가하던 전 장면과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후진타오 주석은 “세계의 어떠한 문제도 미·중간 협의 없이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G2로서의 위상을 과시했다.

미·중 정상회담 합의문 중 제18조가 한반도 관련 내용이다. 양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는 진정성 있고 건설적인 남북대화 추진, 남북관계 개선, 6자회담의 재개를 제시했다.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태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비핵화의 목표를 위해 6자회담과 9.19공동성명의 정신을 중시할 것을 특히 강조했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계획에 대한 우려가 삽입된 것은 한국 정부에 6자회담 복귀를 위한 명분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9.19공동성명’은 2005년 제4차 6자회담의 합의문으로 참가국들이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와 주권을 확인하고 에너지를 지원하는 대신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북핵 문제에 대한 해법이 이미 2005년에 제시돼 있었지만 이행되지 않아서 문제였다는 점을 미․중이 확인한 것이다.

한국의 학자들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미․중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데 대해 묘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물 밑에서 일정한 역할이야 했겠지만 이 문제의 핵심 행위자는 최대 이해당사자인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냐는 것이다. 보수적 학자들까지 하나둘 우리 정부의 태도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먼저 미국 일변도의 태도에서 벗어나 연미연중(聯美聯中)할 것을 주문한다. 북한의 급변사태만 기다리지 말고 북한 스스로의 개방과 변화를 유도하려면 남북 대화에도 나서고, 주변국 모두와 긴밀한 협력 상황을 유지하라고 조언한다.

4. 한국 교회의 역할과 평화를 위한 영향력

한국교회는 한반도평화와 남북관계에 관한 바른 지식과 영성을 기르고, 전문가를 육성할 필요가 절실하다. 과거의 남북관계 진전도 이러한 전문가들에 의해 이뤄졌으나 매우 소수의 인원들인데다 정권의 향배에 따라 부침이 심해 그 전문성의 발현이 힘든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교회는 평화를 지지하는 시민이 다수가 되도록 하는 제도(institution)의 하나로 기능할 필요가 있다.

이 시민들에게는 특이한 역할이 필요하다. ‘과도기적 모순을 이겨내는 동시대인’이라고 명명해 본다. 교전에 임해서 총을 쏘고 이겨야 하지만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 우리는 국방을 튼튼히 하면서 북한에 대해 인도적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분단 자체가 모순이라 벌어지는 상황도 모순투성이다. 서해교전과 금강산관광이 동시에 일어났고, 남한 국적의 북한 국가대표 정대세는 ‘조국’의 국가대표로 월드컵에 출전하여 눈물을 흘린다.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고 북한과 대결 혹은 친화 한 가지만 택하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 모순’이다. 이렇게 복잡한 역할을 수행할 이유는 분명하다. ‘북한의 변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북한의 변화’와 ‘평화적 만남’이지만 현재 더 많이 변화해야 하는 쪽은 명백하게 북한이다.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합당한 변화를 택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과제가 있다. 세계 역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북 인도적 지원은 북측의 인도적 위기가 해소되지 않는 한 지속돼야 한다. ‘여호와는…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시146:6,7)’ 말씀처럼 하나님은 공의로 불의한 위정자들을 심판하시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인권 문제와 핵 문제의 해법으로 인도적 지원도 끊고 북한을 고립시키자는 주장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 못하는 일이고 현실적이지도 못하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가 이 두 가지 일을 모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고 통일론을 전개해야 한다.

새터민(탈북후 정착민)을 사랑으로 도와야 하지만 자칫 통일문제, 평화문제의 진전을 위한 고민과 활동을 그것으로 대체해 버리면 안 된다. 그들을 돕되 경험과 상처에서 비롯된 남북 대결적 정서를 따르거나, 객관적 검증 없이 강단에 세워서 교인들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심화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편 상당수의 성도들은 북한이 곧 망하리라는 ‘붕괴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도 이런 속내를 조금씩 드러내곤 한다.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 붕괴론이 마치 ‘시한부종말론’과 같아서 남북 간의 모든 현안들을 무위로 돌리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붕괴론 자체가 20년간 나오고 있는 것은 그만큼 현실과 다르다는 것일 뿐 아니라, 설사 붕괴 상황에서도 남북 관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현실적 대안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은 필요하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교회가 가진 정치적 영향력은 보수․진보의 정치인 모두에게 일정한 평화정책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행사돼야 한다. 그 동안은 실효적 정책을 가진 정권과 갖지 않은 정권이 교차해 왔다면 이제는 스스로의 이념적 정체성 범위 내에서 각자의 실효성 있는 정책을 갖고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세계 교회에 대해 한반도 상황을 알리고 협력과 중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미약한 북한 교회의 몫까지, 당분간 ‘한반도 기독교’를 자처하고 그들의 짐을 나눠지고 세계교회 앞에 나서야 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