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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개척자들 기고]외과수술적 평화

 

 

외과수술적 평화


윤환철(facebook.com/goodngo)


동시대에 지워진 한반도의 평화를 말하고자 한다. 미국이 자랑하던 ‘외과수술적 공격(surgical strike)’은 거짓이었다. 그들의 ‘스마트 폭탄’은 정밀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노력은 좀 더 좁은 범위의 표적을 설정해도 좋다고 본다.


사람마다, 집단마다 나름대로의 도덕교리가 있고 나름의 평화이론이 있다. 사회라는 협동체는 그런 개성을 일부 양보하고 핵심가치는 보존하면서 합의를 유지해 가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도, 세계평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핵심 부문을 지적하고, 우선순위와 시한을 정해야 한다.


소견에는 ‘남북관계’, 그중에서도 양쪽 정부 간 관계가 최우선이다. 그 배터리가 작동하지 않으면 다른 노력들은 방어적이거나 예비적인 것이 돼 버린다. 유럽 평화의 배터리는 양독 관계였다. 통일 독일은 동독과 서독이 왕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관계는 없고, 그 관계의 질이 거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

남북 간 ‘사람의 왕래’는 대한민국 정부가 열고 닫는다. 미국의 정책도 적어도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다. 회전문인사로 워싱턴 정가와 K스트리트의 싱크탱크 사이를 오가는 ‘브레인’들은 한반도에 큰 관심이 없다. 간혹 관심을 보인다 해도 ‘비전’까지는 갖고 있지 않다. 북한은 어제도 안 변했으므로 내일도 안 변할거라는 하나마나한 얘기를 가끔 새로 포스팅한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남한 정부가 뭘 원하는가?”이다. 자기네 핵심 이익과 어떻게 연결될 지가 그들이 관심을 갖는 진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선은 남북 간 사람의 왕래를 활발히 할 철학이 있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아니면 철학이 약하더라도 여론에 밀릴 줄 알고 공명심이라도 작동하게 하던가. 현 정권에 기대할 수 있는것은 후자이고, 권력은 국가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선택지는 국가주의자들로 하여금 공명심에 가득차서 나름의 선행을 하도록 하는 것과 그 나름의 정책이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하는 시민들의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신임 통일부 장관이 내정자 신분으로 “남북 대화에는 전제조건은 없다”고 한 데 대해 찬동하는 글을 SNS에 올렸었다. 그러한 태도가 남북 간 사람의 왕래를 유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어 가지 맘에 안 드는 곳은 이전에 공적 입장으로 엎지른 말을 주워 담기 힘든 것으로 보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행 불일치를 기대하고 있다. 물론 북측의 과격한 말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남북 간 사람의 왕래’가 앞으로 5년 간 우리 시민사회의 전략적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굳이 구분해서 말하자면 물건과 돈이 오갈 때 그것을 통해 몇 사람이 왕래했는지를 봐서 지금 남북 관계가 어떤 지를 판별하자는 것이다.


이 말에 찬동한다는 것은, 현 정부에 오만가지 평화의 과제를 한꺼번에 다 이루라고 주문하는 것을 잠시 보류하고, 남북 간 대화와 왕래를 가능하게 하는 온갖 체스춰들에 대해서 추임새 넣듯이 칭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별적이고 전략적 행동이 시민사회에서는 좀 어려울 수도 있다. 평화는 본질적으로 모든 부문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결성은 잠시 끊어지기도 하며, 통합적인 인식을 하는 대중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러한 대중적 현실 위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의 출발선이다. 그래서 ‘배터리’를 먼저 살리자는 것이다.


한국 정부를 설득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나면 정작 더 어려운 상대는 북한 정권이라는 점이 다시 부각될 것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를 제외한다면, 남북 간 사람의 왕래는 북측이 더 심하게 통제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와 볼 기회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남한 정부는 늘 그들을 초청하고 환영하는 시그널을 보냄으로써, 그들의 초청이나 협상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응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먼저 열고, 먼저 초청하고, 좀 더 호의적이 되는 것은 분단의 일방으로써, 자유주의 국가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따라서 최선의 노력을 유지하는 상태가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이다.


북측이 피포위의식에 시달리면서 대외 개방에 매우 소극적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왕래를 두려워하는 체제는 그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자부심의 표현들은 폐쇄적 행동들과 겹쳐 보면 오히려 수세적인 외침으로 들린다.


지금은 북한의 제3차 핵실험 이후 별로 새롭지도 않은 대북제재가 추가됐고 한․미 군사훈련으로 긴장이 고조돼 있다. 불행한 상황이 한반도를 옭아맨다면 군과 정권 담당자의 선택은 안보에 집중될 수밖에 없고 대중들도 그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사람의 왕래’는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안보의 종착역은 평화이고, 평화는 사람의 왕래를 통해 이뤄지며, 더 많은 왕래를 위한 것이다. 며칠은 이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겠지만, 별스런 일이 벌어져도 대화 국면은 다시 올 것이다. 그 때는 목소리를 내 줘야 한다. 당국자들은 다투더라도 만나고, 끊어진 전화선들 다시 잇고, 명절들 다가오면 이산가족들 상봉시키고, 사업가들은 기회를 찾도록 하고, 새 정부는 자기 업적을 좀 만들어 보라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남북의 당국자들 머릿속에 평화의 철학을 주입할 방법이 없다면 그들의 이기적인 공명심이라도 작동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키보드가 먼저 움직여야 할 것이다. 마치 수술 도구처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