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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나는 왜 남쪽으로 왔는가?

나는 왜 남쪽으로 왔는가?Book Review: 『황장엽 회고록』, 『80년 7만 리 - 통일 한반도를 향한 생명의 전주곡』,『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

 

최고위급 망명객 2인의 고백서
탈북자 중 고위급에 속하는 김현식 전 김형직 사범대학 교수(1932-)가 2013년 말 『80년 7만 리 - 통일 한반도를 향한 생명의 전주곡』이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그는 이미 2007년에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 - 예일대학교에서 보내온 평양 교수의 편지』라는 자서전을 낸 바 있으며, ‘80년…’은 사실상 ‘21세기…’의 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 펴낸 책에는 이전에 없었던 ‘평양성경’에 대한 소개와 거기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저자의 열정이 덧붙여지고 있다. 그는 거의 동시에 ‘평양성경연구소’를 저자로『하나님의 약속: 요한 영어 평양말 대역 성경 예수 후편』을 내놓았다. 그는 어떻게든 동시대의 북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성경을 보급하는 데 여생을 불태우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그에게 ‘영어’는 하나의 유인책이자 유용한 통로가 되는 셈이다).

역대 최고위급 탈북 인사인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1923-2010)도 생전인 2006년 『황장엽 회고록』이라는 책을 펴냈다. 황 전 비서는 책 앞머리에서부터 비장한 어투로 자신이 왜 남쪽으로 왔는가를 토로했다. 본문에 들어와서는 일제의 징용노동자 시절부터 북한 정권의 성립, 김정일로 이어진 세습, 탈북 직전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북한 정치의 중심에서 보낸 세월과 은밀히 묵혀둔 생각들을 정치철학자의 입장으로 회고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는 ‘자유세계’에 건너와서 겪었던 일들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거침없이 밝힌다. 그의 대표적 직함이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라는 최고위급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의 그는 굳이 ‘철학자’ 그 입장을 더 큰 비중으로 내세우고 있다.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두 인물은 거의 동시대를 앞뒤로 살아왔다. 물론, 북한에서 두 사람은 수평적으로 비교될 정도로 비슷한 위상은 아니었다. 김 교수도 ‘… 유목민’에서 우연히 황 비서의 통역을 맡았을 때 긴장하고 떨렸던 순간, 그가 가볍게 건네준 샤프연필을 10년이나 간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모두가 우러르는 ‘권력의 핵심’이었다고 진술한다. 황 비서의 맏딸은 김 교수가 봉직했던 김형직사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교수는 황 비서보다 5년 앞선 1992년에 입국하여 그의 망명을 예견하는 위치에 있었다. 김 교수는 황 비서와 25년만에 서울에서 재회하고, 황 비서가 이사장인 국정원 소속의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원이 된다.

책은 김 교수의 것이 더 재미있다. 대화를 그대로 옮기고,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밝혀둔 것이 마치 재미난 소설처럼 책장을 넘기게 한다. 북한의 제1세대들, 그중에서도 엘리트 계층이 살아온 모습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주의사항은 ‘시차’를 감안하고 읽을 대목들이 있다는 점이다. 북한 출신인 한 대학생은 이 책을 읽고 “저자와 내가 살아온 북한은 서로 다른 북한”이라는 혹평도 있었다. 김 교수가 자신이 받은 혜택인 무상교육을 비롯한 육아, 고아들에 대한 배려 등 초기 북한 사회의 복지제도를 회고한 내용을 읽고서다.

탈북 과정 부분도 김 교수의 수기식 전개가 더 생생하고 진솔하다. 그는 러시아의 한 항구에서 마산 항으로 밀항하는 괴롭고도 긴박한 상황들과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숨겨주고 배려해 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일일이 표현하고 있다. 황 비서는 독자들이 궁금해 할 만한 사실 묘사를 자제하거나 숨기는 대신, 본인의 비장한 심경을 기억에 남기려 한다.

두 사람의 탈북 망명에 가장 직접적 요인은 국정원(안기부)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 교수는 모스크바에서 적극적으로 망명을 권유해 온 사실, 미국의 누님을 만나도록 함으로써 결국 김 교수가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정황을 솔직하게 밝힌 반면, 황 비서는 국정원과의 관계나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납득할 만한 정황이나 긴박한 순간들을 충분히 서술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사후 3년 뒤인 2013년 말 발간된 『화해와 평화의 좁은 길 - 남북나눔이 걸어온 20년』(홍정길 외)에서 짧게나마 긴박했던 순간들을 찾아볼 수 있다. 황 비서와 김덕홍 사장(당시 ‘여광무역’의 사장이었다)은 당시 CBS 사장으로 있던 권호경 목사에게 정기적인 옥수수 지원을 요청하였고, 권 목사는 ㈔남북나눔 회장인 홍정길 목사와 의논했다. “용감한” 홍 목사는 심양에서 황 비서를 처음 만나 ‘신의 존재’, ‘영생’, ‘주체사상’ 등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했다. 몇 개월 후 베이징에서 다시 만났던 날, 황 비서 측은 옥수수를 요청한 사실을 부인하고, 뜬금없이 “왜 학생운동에 집중하지 않느냐?”는 등의 언사로써 만남의 목적 자체를 무색케 했고, 그 때문에 다음 날 아침 황 비서 일행이 자주 가는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다시 의논하기로 한다. 다음날 약속 장소에는 황 비서 일행 대신 북한 기관원들이 나타나 홍 목사에게 황 비서의 행방을 묻는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 홍 목사 일행은 만남을 포기한 채 귀국 비행기에 올랐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이라는 특보를 듣게 된다. 권호경 목사는 망명을 위해 한국대사관을 행선지로 정한 황 비서가 자신을 감시하는 기관원들을 따돌리기 위한 미끼로 홍 목사와의 약속을 이용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자신이 옥수수 지원 요청을 홍 목사에게 부탁한 것이 일순간이나마 홍 목사를 위험에 빠뜨렸던 순간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탈북 고위 인사인 황장엽의 '황장엽 회고록'과 김현식의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 책표지.

왜 왔는가 - 같은 고민, 다른 방향
따뜻하든지 냉철하든지, 두 사람 모두에게 펼쳐진 잔혹한 운명은 북에 두고 온 가족들과 자신으로 인해 희생되었을 측근들과 제자들을 떠올려야 한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북측에서 황 비서에게 아픈 아들을 앞세워 협박전화를 걸어왔던 일, 아내의 자살과 딸의 강제 이혼 등 집안이 풍비박산된 소식을 들었던 날들을 기록했다. 김 교수는 아들이 당할 고통을 떠올리며 고뇌하는 황 비서에게 “왜 오셨습니까? 그 쪽에 그냥 계시지……”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평범한 이민자라도 ‘내가 왜 이곳에 왔는가?’를 끊임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해답이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에게 필요하고, 타인도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되돌릴 기약이 없고, 가족을 비롯해서 무고한 피해자가 생겨날 수 있는 탈북 입남(脫北入南)을 결행했다면, 그것은 결코 가벼운 물음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이 물음이 두 회고록에 나타난 같은 고민과 다른 방향을 찾도록 한다.

김현식은 자신의 일생을 이끌어온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미래지향적인 사명을 찾아 헌신하는 것으로 이 물음에 답하려 한다. 반면 황장엽은 그 대답을 과거에 대한 변명에서 찾으려 한다. 자신은 애초부터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적 이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며, 부조리한 북한 체제 내에서 불만이 많은 정치철학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1967년 이후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및 프롤레타리아독재이론과 결별하고 인간과 인류에 충실한 ‘인본주의자’로 전환”하였다고 썼다. 그의 인본주의 철학이 바로 마르크스주의가 결여한 ‘인간론’이 보완된 -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 ‘주체사상’이다. 그러나 그의 불만은 자유세계에 와서도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사상전쟁을 치르기 위해 남쪽에 건너왔더니 북한과 맞설 단일한 사상체계가 아니어서 불만이라는 것이다. 그는 가장 나은 정치집단이 ‘시대정신’ - 지금은 실체가 모호한 ‘뉴라이트’의 싱크탱크 - 그룹이라며 김대중과 햇볕정책에 대항하는 입장을 택한다.

이러한 황장엽 비서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애써봤지만 해답보다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 사회주의와 결별한 ‘철학자’가 어떻게 일생의 대부분을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기조에 더하여 봉건적 수령제를 채택하는 국가, 즉 불만이 겹겹이 쌓인 그 체제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글을 써 내고, 그 자신은 최고위급 ‘정치인’으로 살 수 있었는가? 이 의문에 대한 답변 격으로 황 비서는 자신이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을 반대한 ‘반당 수정주의’로 몰린 논문을 쓰는 등의 소극적 저항을 했던 과거들, 주체사상에서 ‘수령’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려 했던 은근한 노력들을 회상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들의 결말은 자아비판이었고, 결국 일생 동안 본격적인 저항에 나서지 못한 채 회한만으로 회고록 대부분을 채우고 말았다.

김현식의 답변은 황장엽의 그것에 비하면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있다. 일생 외국어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아 온 그에게 있어 제자인 북한 학생들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보급해야 하고, 그것들을 통해 자유로운 사상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근년으로 올수록 그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어 날라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있다. 그 대답이 ‘평양성경’이고, 거기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 ‘평양성경연구소’이다. 물론 ‘평양성경’이 필요한가, 성경 번역에 사본학 등 관련 학문의 개입이 부족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본 서평에서는 탈북입남이라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그가 30년의 여정을 지내면서 찾아나가는 자기정체성, 자신의 행동에 부여하는 정당성에 주목한다.

답변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 왜 데려왔는가?
대한민국을 목적지로 한 북한의 (최)고위급 인사들의 탈북은 그 동기와 경로, 과정에 개입된 세력, 입국 후의 대우나 행적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일반적 탈북민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들은 ‘불청객’으로 취급받거나 ‘사회적 지원대상’으로 자임하지 않는다. 그들을 모셔오려는 누군가가 있고, 때로는 거창한 약속을 받고 어려운 결단을 내린다. 두 사람의 망명에 있어 공통점은 ‘북한이 곧 붕괴하리라’는 스스로의 판단, 안기부(국정원)의 공작, 그리고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각기 다른 점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후적 해석이다. 황장엽은 남북한 모두의 사상적 영도가 되고자 했고, 김현식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남북한에 자신의 신앙적 각성을 알리고자 했다. 과거에서 연유를 찾은 황장엽이나 구속사적 경륜 안에서 자기 역할을 찾아나가고 있는 김현식의 공통점은 ‘스스로’ 이주의 정체성을 찾아나간다는 점이다. 그들의 ‘거사’를 이끌어내고 공작을 수행한 국정원(안기부)이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국정원은 대체 왜 이들을 데려왔을까. 당시 이들이 국정원을 곧 ‘대한민국’으로 여겼다면, 국정원은 우리 모두를 대신한 셈이다.

망명 직전 황장엽이 느낀 북한의 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그는 1995년도에 당원 5만을 포함한 100만 명의 주민이 굶어죽은 것으로 파악했으며, 1996년도 알곡 생산량은 최소필요량의 절반 가량인 210만 톤이었다. 상황이 절박한데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인민 생활에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전력 등 사회적 자원배분에 직접 개입하여 기존 조직의 작동을 더 어렵게 했다. 군 내부의 도덕교양이 ‘총폭탄’이 되어 수뇌부를 사수하는 것으로 일원화되면서 제대군인들의 도덕성이 떨어졌고, 이들이 제대 후 진출하는 사회 각 기관의 도덕적 수준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키면 승산이 있다는 군부와 대남사업부의 보고에 따라 전쟁에서 출로를 찾으려 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 상황에서 반 김정일 투쟁을 벌인다면 ‘개죽음’일 뿐이고, 자결한다 해도 ‘반역자’라는 누명만 쓰게 될 것이 뻔했다. 이때, 그와 혼연일체였던 부하 김덕홍은 “싸우다 죽자”면서, “앞으로 남한을 주체로 하여 우리 민족이 통일될 것”이며 “남쪽과 손을 잡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자유세계로 넘어온 황 전 비서에게 ‘예기치 못한 사태’는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 것과 그 자유세계가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정권이 바뀌자 국정원이 돌변했다고 느꼈다. 그는 “김정일의 사상적 침공 때문에 좌경 반미기지로 전환되고 있는 한국의 엄중한 현실”을 개탄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신변안전 문제를 들어 미국 방문을 불허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허용했으나 다녀와서도 별로 보람이 없었다고 썼다. 이 대목이 심복이었던 김덕홍과의 결별에 관련된다. ‘망명정부 수립’을 통한 전투적 북한민주화 활동과 즉각적 방미를 주장했던 김덕홍은 이에 소극적인 황장엽이 국정원의 회유에 넘어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신동아, 2002년 4월 1일, 통권 511호).

우리는 황장엽과 김덕홍의 갈등보다도, 이들의 세계정세 판단과 사고방식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황장엽은 미국에 대하여 ‘반테러 전쟁’을 ‘반독재 전쟁’으로 바꾸고 전 세계에서 독재정권을 없애달라고 주문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미국이 그런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국가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주문이다. 김덕홍의 ‘망명정부’론은 현재의 북한 정권을 강하게 부정하고자 하는 정서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은 북한 정권의 핵심부에 인생의 황금기를 거의 모두 바치고, 그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라는 반대쪽 극단을 선택하고는 곧바로 선봉장이 되어 전투에 돌입하려 한 것이다. 참으로 극적인 대 전환이고, 놀랄 만큼 단순한 생각이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핵심은 정의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내부적 투쟁과 희생으로 이뤄졌고, 지구상 다른 나라의 민주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이들이 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현식 교수는 남한에 오면 “신분을 비밀로 하고 서울대에서 러시아어 강의와 북한 연구를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 거짓 사탕발림이었다며 국정원을 고발한다. 러시아에서 그를 회유하던 국정원은 그가 입국하자 새파란 요원들을 투입하여 자신을 보증해 준 북한 제자들의 이름을 대고, 자신의 신분도 언론에 밝히라며 그를 괴롭게 심문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북한에 당당히 맞서야 하지 않느냐는 다그침이었다. 여기서 그는 ‘선생’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자신이 사라진 사실만으로도 제자들은 충분히 고통을 당하게 된다. 더구나 자신이 더 요란스럽게 반북 활동에 나서면 자신이 겪어야 할 죄책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결국 그는 국정원에 대항하여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한 주간 단식 후에 기지를 발휘해서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미국의 누이에게 유서를 써 보내고도 단식은 계속됐다. 총 2주간의 단식투쟁 끝에 겨우 신분을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국정원은 왜 그들을 데려왔을까. 각자의 인생이 불쌍해서? 서울에서 거창한 직함을 주고 지도자 노릇을 시켜주려고? 아니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 모두 아니었다. 이주민, 망명객의 자아를 찾아가는 것은 철저히 당사자들의 몫이었고, 국정원은 갈등의 대상이었다. 어떤 효과를 얻었다면 일정정도 북한 체제에 타격을 준 것 정도다. 그러나 심지어 ‘주체사상’을 ‘내 사상’이라고 하는 황장엽 전 비서를 데려왔는데도 그것으로 인해 체제가 흔들리는 조짐은 없었다. 황 비서는 자신의 전략이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민주화를 이끌 수 있다는 과도한 생각에 사로잡혔고, 자신이 건설에 참여한 그 체제의 앞날을 예측하는 데 실패했다. 혹시 국정원이 어느 음지에서 또 다른 ‘한 건’을 준비 중인지도 모르겠다. 미리 충고하자면 역사에 기여하는 부처로 변화하길 바란다.

‘결정적 한 건’은 없다
민주주의는 거기 사는 사람들의 역량만큼 이뤄질 것이다. 힘없는 민중들은 마음으로나마 민주주의를 지지하여야 하고, 그러한 지지 위에서 지식인과 더 큰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움직여야 한다. 억압된 체제에서 희생을 동반하는 저항은 불가피할 수 있다. 주로 북한 밖에서 이뤄지는 북한 민주화 운동의 고민도 어떻게 내부의 민주역량을 키울 수 있는가 하는 데 봉착하게 된다. 최고위급 탈북자 황장엽 전 비서가 북한 고위층의 사고방식을 대표한다면, 그 계층이 북한의 변화나 한반도 문제의 해결에 기여할 역량이 크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황 전 비서는 생을 마칠 때까지 그 스스로 ‘인본주의 철학’으로 분류한 ‘주체사상’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사상으로 세계의 민주화를 이룰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북한과 ‘사상전쟁’을 치러야 할 남한의 지도이념이 왜 단일화되어 있지 않느냐는 불만을 터뜨렸다. 이 대목은 유럽의 철학을 섭렵한 철학박사인 그가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를 두루 살핀 식견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판단이다. 어떻게 자유세계의 국가 혹은 사회 이념이 단일할 수 있는가. 그가 사회 이념에 있어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그 사고방식 때문에 권력의 핵심에서 불만을 품고서도 저항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김현식 교수는 황장엽 전 비서의 정세 인식과 판단에 동의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전공이 아니었을 뿐더러, 탈북의 이유도 아니었다. 김 교수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수동적 추종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대에 ‘탈북자’로 자임하거나 그렇게 불리는 개인들이 그 이주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려면 김현식 교수의 길을 권하고 싶다. 중간에 시한부종말론에 빠지는 오류도 있었지만, 그는 대체로 기독교 유신론적 관점에서 역사와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그래서 황장엽 비서보다는 더 따뜻하고, 북한 체제를 추억함에 있어 더 정확하며 솔직하다. 또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장성택 등 북한의 지인들을 추억하며 옛 제자 김정일에게 보내는 서신도 챙겨 넣었다. 김 교수에게 기독교는 정착과 생계에 도움을 주는 종교를 넘어서 자신의 일생을 인도하고 기쁘게 여생을 바칠 수 있는 체제로 자리 잡았다.

한편, 이 책들을 읽는 남한의 독자들은 북한의 최고위급 인사들의 망명이 한반도 문제의 해결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리라는 과도한 기대는 접어야 한다는 판단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이 70년을 향해가는 동안 북한의 수령은 둘이나 죽었고, 김현식 교수와 다른 탈북민들이 오매불망 기대하던 장성택도 허무하게 처형되었다. 우리의 불안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그대로 있다. 북한의 변화를 정말로 바란다면 역사적 한탕주의보다는 꾸준한 변화의 누적을 기대하여야 한다. 그 누적을 위한 접촉과 긴장관계가 이어져야만 우연적인 사건․사고들도 역사를 발전시키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윤환철/ 미래나눔재단 사무국장

계간 [통일코리아] 2014년 봄호에 기고한 글이며, 여기를 누르면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