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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한반도 공동체의 눈으로 봐야 할 분단과 통합

두레성서이야기 43호(2016. 1/2월) 기고문 입니다.

한반도 공동체의 눈으로 봐야 할 분단과 통합

윤환철(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

통일 문제가 날로 비대해지고 있는데 진도는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명백한 퇴행만 보입니다. ‘통일은 두 집단 사이의 관계라서 고구마 줄기처럼 국가, 분단, 통합, 평화, 국제정치를 주렁주렁 달고 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 본원적 이유 외에도 아이들 급식이나 저렴한 지방의료원의 존폐, 빈부격차의 인식과 해법, 경제 체제에 대한 합의나 변화, 정부에 대한 순응과 비판까지 모조리 북한과의 친소관계로 몰아가는 흐름은 예전과 그 정도가 다릅니다. 퇴행이라는 것은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이전보다 더 못한 남북 관계의 질과 양을 볼 때 명백합니다. 평화의 진전도, 이산가족 상봉이나 대북지원과 같은 인도적 수치들도, 심지어 탈북 후 입국자도 전성기의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7~8년간은 그야말로 퇴행이고 분단 햇수만 늘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대통령이 미국과 통일논의를 긴밀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전 장면은 중국과였죠. 통일을 중국이나 미국하고 하는게 아닌데도 말이죠.

90년대 말 라진선봉두레마을실무를 맡아 북측을 상대로 한 문서 작업이 첫 만남이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다른 조직에 몸담고 신의주, 평양, 개성을 들락거리며 제대로 대면했습니다. 문서로만 대면했던 라선경제협조회사사장은 터무니없는 송금을 요구하기에 당신네 법과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답장했었는데, 나중에 총살당했다는 소식만 들려왔습니다. 꽤 충격적 시작이었죠. 2004년 룡천역 폭발 사고때는 의약품을 긴급히 들여보내고 며칠 후 신의주를 방문했더니 다친 아이들 얼굴은 안 보여주고 관광일정을 읊어대더군요. 다 거부하고 압록강려관에서 낮잠 자다 다음날 단둥으로 나와버렸습니다. 이후로도 제가 대면한 북측 공직자들은 하나같이 실망스러웠습니다. 거의 싸우러 가는 셈이었습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라면 그런류의 사람들을 두 번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하간, 저는 실존적 질문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죠. 내가 이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북한에 넘겨 준 물품들은 어떻게 해야 필요한 사람에게 도달할까? 이런 노력은 통일에 도움이 될까? 통일이 먼저일까 평화가 먼저일까?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속에서 바쁜 나날이 계속됐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공부를 시작했는데 남북 문제와 앞서 언급한 고구마 줄기같은 주제들에 있어 우리 사회의 출발선부터 불능의 개념이 있다는 사실이 보이고, 그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걸 느낍니다.

 

분단과 주권의 재고

분단, 통합, 통일은 하나같이 국가 혹은 국가의 주권(sovereignty)과 관련됩니다. 정치적 개념의분단은 한 국가의 주권이 갈라진 것이며, ‘통일’(unification)은 둘 이상의 주권체가 하나로 합하는 것이죠. ‘통합’(integration)은 그러한 통일의 전제조건이자 유지조건으로 둘 이상의 집단이 일체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며 지속상태로 정의됩니다. 한반도 이슈는, 문제의 입구인 분단부터 그리 단순하지 않더군요.

1910대한제국의 주권상실, 1945년 일제 패망에도 주권 미반환, 1948년에 남북 각각의 정부수립, 남북한 각자의 정통성 주장, 1991년에 UN 동시가입, ‘two Koreas’를 공인한 상태이것이 우리가 분단이라고 부르는 타임라인입니다. 이것만 보면분단(分斷)’이 아니라분립(分立)’된 것이고, 그것을 상호 인정까지 한 셈인데(그것도 보수정권 시기에), 이것을분단이라 칭하고 그 회복인 통일을 과제로 설정하려면 뭔가 논리적으로 빠진 부분을 찾아 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에 수립된 정부를 국제사회가 인정한 것이 UN총회 결의문 ‘195 (III)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입니다. 이 결의문은 대한민국 정부를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지만, 그 주권범위는 자유총선거를 치른 38°선 이남으로 한정했습니다. 앞은 우리가 중등 사회 시간에 배운 바와 같고, 뒤는 생소하죠. 우리 정부는 유일한 합법정부만을 교육해 왔고, 그것을 근거로 한반도 전체를 주권범위로 주장했습니다. (결의문 원문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죠. 구글 검색하면 나옵니다.)

적대관계, 강한 상호 간의 흡수의지 등등이 있었겠지만, 이 결의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 잘못된 출발선이고, 지금까지도 심대한 오류의 원인입니다. 이북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거나, 정권이 붕괴하는 것이 문제의 해법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죠. 대한민국 정부는 그 주권범위 인식 때문에 적어도 두 차례 국제사회와 대립했습니다. 1950 10, 연합군의 한반도 전체 점령이 눈앞에 왔다고 생각했을 때, 이승만 정부는 북한 지역에 행정관을 파견하여 관할권을 행사하려했지만,  같은 날 UN은 그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1948년에 치르지 못한 선거를 마저 치르려고 ‘UNCURK’라는 조직을 만들죠. 무주지(無主地)가 발생하면 그 지역의 주민(민족이 아닙니다)들의 자유의사만이 주권과 정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도 변함이 없죠. 또 한번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한일수교협상에서 전범국인 일본에 대해 한반도 전체 몫의 배상을 요구했지만, 대한민국 정부에겐 북한 몫의 권리가 없다는 일본의 입장으로 귀결됐습니다. - 일본은 한반도 전체에 범죄를 저질렀지만, 배상은 남북에 나눠서 해야 하죠 - 두 경우 모두 앞서 소개한 1948 UN총회 결의문이 근거가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단절과 복구

이처럼, 정치체계로서의국가’(state)차원에서분단을 파악하려는 것은 우리 내부의 관성일 뿐 불능의 개념입니다. 어떻게든 유효한 개념을 찾아내 우리가 인식하고 후세대에게 넘겨야 할 시점입니다. 저의 제안은 공동체혹은 사회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공동체를 원형질로 삼아 수립되는 것으로 보아 다시 다뤄야 합니다.

존 롤스(J. Rawls)라는 정치철학자의 견해를 빌자면, 하나의 사회란 자유롭고 합리적인 구성원들의협동체이고, ‘협동체에 시간축을 고려하면역사상 시간속에 펼쳐진 협동체가 됩니다. 남북한 구성원 간에 무의식적 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서 현재의 남한과 북한은 다른 사회로 파악됩니다. 일정하게 서로를 외국처럼 취급해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시간, 시간축을 줌아웃해서 넓게 보면 분단이라고 할만 한 것이 드러납니다.

한 세대는 선행세대의 성과와 유산을 받아 누리다가, 더 잘 살기를 바라는 소망만큼 더 얹어서 후세대에게 넘깁니다. 당대의 좋은 것들생산력, 문화, 공정성, 평화 등등을 유지하고 후대에 넘기는 것은 당연한 의무고, 그것을 다하지 못한 세대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것은 일가족(family line)과 사회가 마찬가집니다. 이것을 세대 간의 협력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단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서로 주고받는게 아니라 내리사랑처럼 받은 협력을 잘 넘겨줄 때 정의롭다고 합니다.

대략 과거 70년만 떼내보면 명백히 하나의 사회가 아닌 남북한은 이전 세대의 협력의 수혜자라는 면에서는 하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간단한 예로 독립운동가들이 남한이나 북한 어느 한 쪽의 후세대만을 위해 재산과 목숨, 자손들의 미래까지 내놓았다고 상상할 수 없고, 더군다나 70년 이상 싸우고 다투는 두 나라를 꿈꿨을 리 만무합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물려받은 세대는 일제 강점 이전의 하나된 공동체를 회복하고, 불가역적 평화의 상태를 완성하여 다시 미래세대에 넘길 의무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정의롭지 못한 형편에 처했습니다.

여기서분단하나의 국가가 나뉜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에서 끄집어내어 한반도에 적합한 설명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역사상 시간속의 존재하는 협동체(협력구도)가 깨진 상태. 그러면 통일을 소망한다는 것은 그 깨어짐이 일시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며, 시간축의 미래 부분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훗날 남북이 완전히 통합된 시점에 이 시대를분단시대 ‘2국시대라고 칭하면서 바라본다면 한반도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유구한 협력구도에서 일탈한 기간이 될 것입니다.

 

현재를 존중하는 협력, 미래 지향의 통합

이 글을 보시고 북한의 붕괴가 그 자체로 해법이 아니라는 것만 받아들이셔도 좋겠습니다. 분단이 역사의 흐름속에 있는 공동체 차원에서 파악되듯이, 통합도 공동체의 재결합이 그 원형질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현재를 인정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죠. 그건 지금부터 가능합니다. 70년간 다른 사회인 북한을 존중하고 가능한 협력을 해 나가는것입니다. 그 협력이 깊어질 때 미래상을 공유할 수 있을것입니다. 좋은 사례가 개성공단입니다. 오늘도 53천여 북측 노동자와 800여 남측 관리자가 한 직장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부양가족을 합하면 20만 이상의 북한인들이 우리 기업들로 인해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북의 합의에 의하면 이 규모는 최소한 20배 정도 커졌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취임 전에는 통일부를 없애려 하더니, 취임하자마자 개성공단의 본단지 계획을 핵 문제와 연계함으로써 멈춘 것입니다. 이른바, ‘비핵·개방·3이라는 구도였는데, 핵 문제를 목숨으로 생각하는 북한에게 먹을것과 바꾸자고 한 셈이니 통할 리 없었습니다. 기업인들의 천신만고끝에 개성 공단은 아직 살아남아서 남북 문제의 실낱같은 희망이 되었습니다.

제가 담당했던 인도적 지원 부문도 현재적 협력과 미래를 밝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서두에 쓴 것처럼 난관이 많습니다. 그 난관들은 대부분 적대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내부의 취약계층을 목표로 접근하는 우리와 그것을 자원 유입의 통로로 보고 나서는 북한의 관료들과의 긴장입니다. 짧게 말씀드리자면 지속적이고 원칙적인 접근을 통해 북한 관료들을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식량난, 수해, 사고, 의료 등 고통받는 사람들을 함께 돕는 협력자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이명박 정부 이후 1/10으로 줄더니 최근에는 거의 명맥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현 정부 들어서도 거의 문을 열지 않다가 지난 8월 수해지원에 소량의 승인이 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남북 관계를 북측에서 막는줄 아시더군요. 예전엔 그랬습니다만,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우리 정부도 막고 있습니다. 외신 앞에서 하는 말과 정 반대로 행동합니다.

 

미래 세대앞에 정의로운 당대

사실 암울합니다. 정부와 대통령이 붕괴론이라는 불능의 전제를 끌어안고 있는것은 우리 대중들이 앞서 말씀드린 사실을 모르거나 도외시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북측의 협력 의지를 끌어내야 하는 우리 정부가 관계 진전의 의지는 없고, 늘 하는척만 합니다. 기이한 언론사들이 이를 포장하기에 급급하죠. 대북 정책에 관한 한 아직도 이명박의 치세입니다. 이른바 5.24조치의 규정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으니 말입니다.

통일을 꿈이라고 말하려면 먼저 분단의 현실들을 통찰해야 합니다. 정부와 대통령은 유구한 공동체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걸 국익이라고 포장하더라도, 한 정파의 찰나적 이익은 다시 회복해야 할 한반도 전 구성원의 협력구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권자인 민()은 선택해야 합니다. 입에 통일을 달고 살지 말던가, 자기들이 세울 정권이 하나같이 공동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게 만들던가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기도할 때마다 통일을 주옵소서하면서, 자기가 지지한 정파가 그 정책과 진정성이 있는지 확인은 하지 않는 위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정파로 하여금 정책경쟁에 돌입하게 만드는 것이 통합을 방해받지 않는 공동체 구성원의 첫 걸음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 손자녀들을 객관적으로예쁘고 똑똑하다고 하더군요.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엄청난 부채와 반()평화의 현실을 안겨 줄 정책과 정파에게 표를 주기도 합니다. 객관적으로 나쁩니다. 후세는 이런 행위를 부정의하다고 규정하면서 그만한 고통에 시달릴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제안과 부탁은 단순합니다. 능력 없는 관행적 지성에서 탈출하시고, 정의로운 세대로 남기 위해 몸부림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 노력을 믿음의 증거로 보신다고 했습니다.

 

공동체시각_윤환철_두레성서이야기(44호)_01.pdf